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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청년다운 없다 : <서울 바벨>

서울시립미술관, 16.1.19 ~ 4.5


포토닷 2016년 3월호

글이기원

서울시립미술관은 ‘SeMA 삼색전’-Blue(신진), Gold(중견), Green(원로)- 통해각 계층별 작가/작품을 소개하는 기획전을 이어왔다. SeMA Blue 2016 전시로열린 <서울 바벨> 그동안 개별 작가와 작품에 초점을 맞춰 선보였던 지난 번의 전시와 달리, 2014 말부터 생겨난 서울의신생공간에주목해 17팀의신생공간’/콜렉티브/소규모 디자인 스튜디오를 소개한다. 17개의 공간/팀이 각자의 영역을 할당받아 개별 전시를 기획하는 방식으로구성된 덕분에 각각의 공간/팀들은 서로 다른 방식으로 저마다의 색을 분명히 드러낸다. 이는 시끌벅적한 잔치같은 느낌을 주는 한편, 화랑별로 공간을나눈 아트페어처럼 다소 난잡하다는 인상도 남긴다. 또한 17개로 나눠진 개별 전시가 미술관에 어지러히 모여 있게 됐는지 파고들면, 표면 아래에놓인 문제점들이 하나 둘씩 드러나기 시작한다.


<서울 바벨> 형식상으로는 서울시립미술관이신생공간’/콜렉티브/소규모 디자인 스튜디오들을 섭외하고 이들에게 개별 전시기획을 맡긴전시 전시형식을 띠고, 내용에 있어서는독립적으로 공간을 운영 중이거나 스마트폰과 SNS 기반으로 한시적 공동작업을 영위하고 있는 대안적 공동체의 창작 활동 영역과 방식에 주목하고 이러한 현상을 매핑하기 위해 마련되었다.[각주:1]고 밝힌다. 그러나 미술관이 주목했다는최근의 현상 대해 어떤 분석이나 정리를 거치지 않고, 그저 일부를 떼어 그대로 옮겨오는 방식으로 이를 얼마나매핑 있을지에 대해서는의문이 남는다. 적어도 국공립 미술관의 전시라면, 이러한 현상을 폭넓게 조망하면서 미술관의 시각으로 이를 분석하고 정리한 결과를 함께 선보였어야 하지 않았을까? 물론 도록 말미에 실린 편의 (장진택, 권시우, 최정윤, 윤율리) 각기 다른 방식으로신생공간흐름을 분석, 회고하며 전시에서의 허점을 보완한다. 하지만 이들 명의 필자가신생공간 흐름에 직간접적으로 연관된 이들이라는 사실을 감안하면, 결국 미술관이나 기획자의 시선에서 최근의 현상을 정리/분석하려는 시도는 찾아볼 없었다.

한편 기획전에서 참여작가의 선정 기준을 따지는 것과는 다른 맥락에서, <서울 바벨> 전시의 큰 축인 17개의 공간/팀이 어떤 기준과 맥락에서 선정되었는지에 대한 언급이 없어 다른 의문을 불러일으킨다. 최근 교역소와 커먼센터가 문을 닫긴 했지만, 여전히 서울에는 어림잡아 50여개의신생공간’/콜렉티브/소규모 디자인 스튜디오가 존재한다. 앞서 언급한 정리 분석의 과정과 참여 공간/팀들의 선정 기준이 밝혀지지 않은 상태에서 17개의공간/팀 만으로 최근 젊은 작가들의 움직임(현상) 다루는 것은 어쩌면 장님이 코끼리를 만지는 모습에 지나지 않는다.

물론 이는 50여개의 공간/팀이 모두 전시에 참여해야 한다는 비현실적인 투정을 부리는 아니다. 미술관의 시각으로 현상을 정리해 없었다면, 적어도 도록에 실린 윤율리 혹은 최정윤의 글이 서문형식으로 전시장에 진입했어야 한다. 지금의신생공간 젊은 작가들이 단순히 90년대 대안공간, 청년작가의 연장선으로 치부될 있기 때문이다. 결국 <서울 바벨> 그저 외부의 현상을 그대로 가져와 소비시키는 백화점의팝업 스토어같은 역할에 그치면서,손쉽게 ‘SeMABlue’ 때우기에 급급 했다는 의심을 거두기 어려워졌다.


합정지구, 지금여기 전시 공간 전경


앞서 다룬 전시 기획의 측면에서 <서울 바벨> 노출시킨 문제들은 전시 개막 열흘 한겨레 신문 보도[각주:2] 일으킨 논란[각주:3]의 직간접적인 원인으로도 작용했다. 하지만 오히려 이보다 흥미로운 , 해당 기사를 통해 기성세대가 동시대 젊은 작가들의 움직임을 어떻게 바라보는지 (의도치 않게) 노출시켰다는 점이다. 이는 전시가 지금의신생공간 젊은 작가들이 90년대 대안공간, 청년작가에 대해 갖는 차별점들을 세세히 짚어내지 못한 것이 표면적 원인이지만, 좀더 근본적으로는 90년대청년작가프레임이 여전히 작용하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노형석 기자는 강성원 평론가의과거 거칠고 강렬했던 대안공간 작가들의 역동적 작업들과 달리 신중한 발언과 인테리어풍 이미지들이 많아 애어른들 전시를 보는 같았다 소감을 인용하며실제 전시에서 청년 작가들의 정체성은영악하고 신중한 스타트업 아티스트 가깝다 평했다. 또한 김홍희 서울시립미술관장 역시 도록을 통해새로운 대안적 정서로 기존의 시스템과 고정된 작동 원리를 거부하며 무작위적이고 한시적인 예술 행위를 펼쳐 보이는 시대의 앙팡테리블(무서운 아이들)[각주:4]이라 동시대 젊은 작가들을 규정했다. 그러나 이런 반응은신생공간 젊은 작가의 목소리에 주목하기 보다는 이들에게 90년대 당시 대안공간과 청년작가의 이미지를 그대로 투영해 단순비교하는 오류를 범하고 있다. 특히 오늘의 젊은 작가들에게영악하다거나, ‘애어른 같다 판단을 내리는 기저에는자고로 청년작가(대안공간)라면 ~해야 한다 과거의 프레임-미술관(제도권) 대한 거부, 앞뒤 가리지 않고 일단들이받는태도, 거친,강렬한, 역동적인 등으로 수식되기- 견고히 자리잡고 있다.(이런 지점에서 800/40, 300/20, 200/20 공사장의 비계를 활용해 전시를꾸린 이러한청년작가프레임에서 벗어나지 못한 듯해 다소 아쉽다.) 그러므로 <서울 바벨> 참여한 17 공간/팀과 70여명의작가들을청년답지 못하다라고 비판하는 것은 온당치 않다. 이에 앞서 지금의 젊은 작가들이 90년대 청년작가들과 어떻게 다른지 살펴보는 과정이필요하다. ‘신생공간 동시대의 젊은 작가들에게 과거 대안공간과 청년작가들이 목표로 삼았던 어떤 예술적 성취나 대안을 요구하기에는 동시대 예술환경이 너무나 척박하다. 결국 이들의관심사와 목표는 (일단) 살아남는 , 생존으로 모아질수 밖에 없다. 과거의청년다움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사진제공 : 서울시립미술관


200/20, 300/20, 800/40 전시 공간 전경


  1. 신은진, ‘기획의 글’, 『2016 SeMA Blue 서울 바벨』, 서울시립미술관, 2016, 10쪽. [본문으로]
  2. 노형석, “인테리어가게 같은 청년작가들의 박람회”, 한겨레 신문, 2016년 1월 29일자 A26면 2단 [본문으로]
  3. 해당 기사에서 노형석 기자는 “교역소, 커먼센터 등 주요 신생공간과 기획자 일부는 촉박하게 기획된미술관 전시에 ‘비공감’을 나타내며 불참하기도 했다”고 보도했으나, 교역소와 커먼센터 측에서는 애초에 전시 제안을 받은적이 없었다며 기사 정정을 요구했다. 이후 기사는 정정되었지만, 그과정에서 책임을 회피하는 듯한 담당 큐레이터의 미흡한 대응이 빈축을 샀다. [본문으로]
  4. 김홍희, ‘인사말’,『2016 SeMA Blue 서울 바벨』, 서울시립미술관, 2016, 7쪽. [본문으로]
2016. 9. 26. 16:42  ·  review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