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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두리 사진 보고서> 제5호

*변두리 사진 보고서는 우리의 일상에서 마주하는 사진들이 어떻게 소비되고 작동하는지에 대해 다루는 연재물입니다.



'잘 찍은 사진'은 없다
사진과 카메라를 둘러싼 착각에 관하여 2

글 이기원

포토닷 2015년 6월호


앞선 글에서 필자는 국내에서 사진을 즐기는 동호인들이 그들의 사진에 갖는 정체성이 ‘어떤 사진’을, ‘왜 찍었는가’와 같은 사진가의 의도나 표현방식에 있다기보다는 다분히 그들이 사용하는 카메라에 따라 좌우된다고 밝힌 바 있다. 이번 호에서는 이들이 만들어 내는 ‘사진’을 보며 이러한 현상의 좀더 근본적인 원인을 살펴본다. 


10년이 지나도 변하지 않는 ‘오늘의 사진’ 

한국 사진작가협회(아래 사협)에서 주최하는 공모전이나 SLR클럽, 네이버 포토갤러리 등과 같은 온라인 사진 커뮤니티에 올라오는 사진들을 살펴보면, 주로 오래된 식당에 걸려 있는 달력에서 본 듯한 ‘그림같은’ 풍경사진이거나 80~90 년대 광고 이미지에 쓰였을 법한 인물사진이 주를 이룬다. (앞선 글에서도 밝혔듯)특히 풍경사진의 경우, 각기 다른 사람이 찍었음에도 불구하고 마치 유화를 보는 것처럼 나무와 식물은 한없이 푸르며, 하늘은 바다처럼 새파랗거나 노을이 져 불타는 것처럼 새빨갛게 표현된다. 물가에 비친 풍경 역시 거울처럼 선명하다. 심지어 몇몇 유명 출사지에서 찍은 사진들은 구도까지 획일화된 모습만을 보여준다. 그리고 ‘모델 출사’라는 이름으로 20~30대의 젊은 여성모델을 섭외해 인물사진의 피사체로 삼는다. 

이렇게 모두 비슷해 보이는 사진이지만 동호인들 사이에서 내부적으로 작동하는 ‘사진 실력의 척도’는 분명 존재한다. SLR클럽의 ‘오늘의 사진’이나 네이버 포토갤러리의 ‘오늘의 포토’로 대표되는 ‘1면 사진’ 선정 시스템이 그것인데, 이들 사진에 선정되면 하루 동안 각 커뮤니티의 첫 페이지에 자신의 사진이 게시되고, 회원정보에도 ‘오늘의 사진’으로 선정된 횟수가 기록된다. 그렇기에 사용자들은 이 횟수를 하나의 명예로운 훈장이나 실력을 대변하는 지표로 받아들이며 자신의 사진이 ‘오늘의 사진’으로 선정되는 것을 취미생활의 목표로 삼기도 한다. 이는 어찌보면 이 제도의 긍정적인 부분라고 말할 수도 있다. 하지만 문제는 ‘오늘의 사진’의 선정과정에서 비롯된다. 

어떤 사진이 ‘오늘의 사진’에 뽑히기 위해서는 남보다 더 많은 추천 수를 받는것이 필수적1)이다. 덕분에 이를 목표로 하는 이들은 그동안 ‘오늘의 사진’에 선정된 ‘모범답안’들을 살펴보며 유사한 느낌을 내려고 노력할 수밖에 없다. 모든 ‘오늘의 사진’의 권위를 뒷받침 해주는 것이 바로 그 전날의 ‘오늘의 사진’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커뮤니티 이용자들은 자연스레 ‘오늘의 사진=잘 찍은 사진, 좋은 사진’이라는 착각에 빠지면서, 모두가 ‘모범 답안’처럼 사진을 찍기 위한 경쟁에 뛰어든다. 이와 관련해 사진평론가 박평종은 ‘아마추어 사진가들은 변화할 수 없는가’라는 글에서 다음과 같이 사협의 공모전과 아마추어 사진의 정형성 문제를 지적한다. 


“이 협회(사협)가 주최하는 공모전은 아마추어 사진가 들의 발전을 가로막는 고질적인 병폐가 되어왔다는 생각이다. 이는 최근에 등장한 새로운 사진 애호가들에게 직 결되는 문제이기도 하다. 공모전은 다수의 출품작 중에서 몇 점을 뽑아 상을 주는 방식으로 이루어진다. 따라서 선정의 공정성, 객관성을 기하기 위해 일정한 기준이 필요하다. 여기까지는 좋다. 하지만 그러다 보니 출품자들은 이 기준에 부합하는 방식에 따라 사진을 찍는다. 정형화되는 것이다. 그 결과 사진작가협회에서 주최하는 공모전 사진은 이삼십 년 전이나 지금이나 변함없이 비슷하다. 아마추어 사진가들이 한 해 동안 촬영하는 이루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사진들이 일정한 패턴을 따르고 있는 셈이다.”2) 


경쟁과 정복의 대상으로 변질된 취미활동 

다른 취미활동과는 조금 다르게, 유독 우리나라에서 취미로서의 ‘사진’은 여가시간을 즐겁게 보내기 위한 활동이기 보다는 소위 ‘끝장’을 보기 위해 장비의 수준을 높이고, 남들이 아직 찍지 않은 피사체(장소)를 선점해 보다 더 많은 사람에게 인정받기 위한 경쟁의 양상을 보인다. 그렇기에 자연스레 ‘오늘의 사진’ 선정작이나 공모전 당선작은 이들에게 하나의 ‘모범답안’이며 올림픽의 금메달과 같은 의미로 작동한다. 결국 사진 커뮤니티는 같은 취미활동을 하는 사람들 사이의 소통을 위한 공론장이기보다는 서로의 촬영 실력을 겨루고 비교하는 각축의 장으로 작용한다. 또한 이는 온라인 사진 커뮤니티만의 문제가 아니다. 앞서 언급된 공모전식 사진이 아닌 ‘예술로서의 사진’를 지향한다는 몇몇 사진 모임에서도 ‘사진지옥훈련’이니 ‘사진의 끝판왕’이니 하는 다소 모순적인 표현을 사용해 자신들을 소개하는 경우를 심 심찮게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영혼없는 칭찬만 가득한 사진 게시판 

획일화된 사진이 만들어낸 또 하나의 문제는 소통을 위해 만들어진 커뮤니티에서 정작 서로의 사진에 대한 소통의 기능이 전혀 작동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특히 ‘오늘의 사진’ 으로 선정되기 위한 후보들이 올라오는 사진 게시판의 경우, 마치 기계가 댓글을 다는 것처럼 한결같은 반응만이 가득 하다. ‘아름답습니다’, ‘그림같은 풍경입니다’, ‘멋진 구도입니다’, ‘느낌있는 사진입니다’ 등 그저 인사치레하는 ‘영혼없는 칭찬’만이 오가는 것은 기본적으로 서로 칭찬은 쉽게 할 수 있지만 비판을 가하려면 어떤 ‘권위’가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아쉬운 사진에 대해서는 이른바 ‘무플’과 같은 외면이 비판의 자리를 대신한다. 더 근본적으로는, 사진 게시판에 올라오는 거의 대부분의 사진들이 연작이 아닌 사진 한 장 단위로 구성되어 있기에 이를 감상, 평가하는 기준이 작가의 의도나 맥락에 있기보다는 그저 피사체의 조형성이나 기술적 완성도(구도, 노출, 초점, 색감)에 머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기술적 완성도에서 전혀 흠잡을 부분이 없고, 피사체 역시 누구나 조형적으로 아름답다고 느낄 수 있는 사진(자연경관, 야경, 여성 모델, 어린아이)에 대해 칭찬 외에는 어떤 할 말이 없는 것은 너무나 당연하다. 혹여 획일화된 사진에 비판을 하려고 해도 모두가 그런 사진을 선보이기 때문에 선뜻 나서기도, 비판이 힘을 받기도 어렵다. 결국 사진 게시판에는 정형화된 사진만 올라오고, 그런 사진에 칭찬을 보내는 사람들만 남아서 활동을 이어가게된다. 마치 개구리만 가득한 우물의 풍경이다. 


‘그림같은 사진’을 향한 욕망 

지금까지 다룬 내용(카메라에 대한 집착, 사진의 획일화, 경쟁적 풍토, 칭찬뿐인 댓글 등)들을 어떤 명확한 인과관계로 묶어낼 순 없지만, 한 가지 확실한 점은 이러한 현상의 기저에는 사진을 대하는 뒤틀린 인식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지금까지 언급한 ‘동호회 스타일’ 사진을 다시 살펴보면, 고전회화와 유사한 문법으로 구성되어 있다는 걸 눈치챌 수 있다. 한치의 오차없이 똑바르게 정렬된 수평선, 황금분할에 맞춰 배치된 피사체, 칼로 베어낸 듯한 선명함과 같은 요소는 결국 이들의 사진이 애초 사진이 처음 탄생했 을 때, 그것에게 주어졌던 역할(더 정교한 그림을 그리기 위한 도구)에서 거의 벗어나지 못하고 여전히 회화의 문법에서 사진을 바라본다는 사실을 말해준다. 이는 좀 더 나아 간다 하더라도, 앙리 카르티에-브레송(Henri Cartier-Bresson)의 ‘결정적 순간’에 대한 집착에 머물게 된다. 이젠 모든 사람이 사진을 (기술적으로) ‘잘 찍을 수’ 있는 시대다. 그렇기에 그동안 ‘잘 찍은 사진’이라 칭송받던 것을 답습하는 것은 예술적으로도, 취미생활로도 별다른 의미가 없다. 이는 결국 앞서 언급한대로 ‘오늘의 사진’용 모범답안에 도달하기 위한 과정으로만 남게됐다. 더 이상 ‘잘찍은 사진’은 ‘좋은 사진’과 같은 의미를 갖지 않는다. 그렇다면 ‘좋은 사진’은 무엇일까? 


‘좋은 사진’이란 무엇인가 

물론 ‘좋은 사진이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정답은 없다. 더군다나 누군가가 선뜻 나서 규정지을 수 있는 문제도 아니다. 하지만 필자는 ‘좋은 사진’이란 생명력이 긴 사진 이라 생각한다. 우리가 종종 위대한 예술작품에 대해 무한한 생명력을 가졌다는 표현을 사용하는 것은 이들 작품이 끊임없이 누군가에 의해 재해석과 연구가 이루어지며 몇 십 년에서 몇 백 년이 지나더라도 감상하려는 사람들이 계속 생겨나기 때문이다. 이는 비단 예술작품으로서의 사진이 아니어도 마찬가지다. 몇 년이 지나도 다시 꺼내보게 되는 사진이나 다시 볼 때마다 의미가 새삼 다르게 느껴지는 사진이 바로 ‘생명력이 긴 사진’이다. 

다시 돌아와서, 온라인 사진 커뮤니티에 끝도 없이 올라 오는 현란한 풍경사진과 아름다운 모델이 담긴 사진들을 보자. 이들 사진은 언제든지 더 아름답게 더 잘 찍었다고 판단되는 사진이 나타나면 가차 없이 배제될 수 있는, 그야말로 하루살이와 같은 생명을 가졌다. 그나마 ‘오늘의 사진’에 선정되면 이틀 정도 살아남는다. 온라인 커뮤니티에서 2014년에 올라온 모터쇼 모델의 사진은 웬만한 경우가 아니고서는 2015년의 게시판에 다시 나타나지 않는다. 이는 풍경사진도 매한가지이다. 하지만 가족을 찍은 사진이나, 추억이 담긴 공간, 사건이 기록된 사진은 남은 일생에서 끊임없이 재소환되고 재해석될 여지가 남는다. 이처럼 ‘나의 이야기’가 담 긴 사진은 모터쇼의 모델이나 유명 출사지의 풍경보다 훨씬 더 긴 생명력을 부여받는다. 게다가 이런 사진 속에 담긴 이야기가 설득력을 가질 때, 타인의 시각에서도 훨씬 더 흥미롭게 다가오고 하나의 작품으로 발전되기도 한다. 

이러한 사진의 힘은 지난 2010년, 출간 20년 만에 복간된 전몽각의 사진집 ‘윤미네 집’이 증명한다. 사진 한 장 한 장은 어린시절 누구나 찍혔을 법한 사진과 크게 다르지 않지만, 그것이 한데 모이면서 훨씬 더 오래 지속될 수 있는 생명력을 부여받은 사례라 할 수 있다. 물론 그렇다고 모두가 ‘윤미네 집’과 같은 사진을 찍어야 한다는 것은 아니다. 적어도 사진 실력이라는 허상을 검증받기 위한 ‘성적표’로서의 사진이 아닌, 자신의 일상을 기록하고 나만의 이야기를 풀어내는 일기장 같은 사진이 더욱 많아지기를 바랄 뿐이다. 

 


그림같습니다(It Looks Like a Painting), 캔버스에 아크릴, 50×100cm, 2013 



반영(Reflection), 캔버스에 아크릴, 145.5×112cm, 2013



천지창조(The Creation), 캔버스에 아크릴, 74.2×116.7cm, 2013


김윤호 작가의 ‘사진전II’는 인터넷상의 사진 커뮤니티나 블로그에 실린 풍경사진들의 ‘영혼없는 칭찬’ 일색인 댓글들을 가져와 캔버스에 조형적으로 나열해 만들어진 시리즈다. 작가는 열렬히 사진을 찍지만 정작 이상향은 그림에 매여 있는 사진 동호인들의 모순을 ‘그림’의 형식으로 흥미롭게 지적한다. 


메인사진 제공 : 김효열


각주

1) :  SLR클럽은 회원 간의 추천, 조회 댓글 수를 집계하는 시스템에 의해 자동으로 선정되고 네이버 포토갤 러리의 경우 네이버 측에서 임명한 심사위원이 ‘오늘의 포토’를 선정하고 있긴 하나, 이 역시도 기본적으 로 하루동안 많은 추천수를 기록한 사진들 중에서만 뽑힌다. 

2) 박평종, ‘아마추어 사진가들은 변화할 수 없는가’, 황해문화 2010년 가을호, 2010, 358쪽




2016. 9. 26. 16:35  ·  critique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