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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ndrea Gursky, May Day V, 2006, C-Print
 
당연히, 예술사진도 사진이다

글 이기원

 한겨레 문화센터의 사진 강좌를 맡고 있으며 한겨레신문의 선임기자이기도 한 곽윤섭 기자(이하 곽기자)가 운영하는 블로그 <사진마을>은 사진에 대한 다양한 정보가 올라오며 많은 아마추어 사진가들이 활동하는 곳이다. 
 지난 9월 10일, 곽 기자는 ‘예술사진도 사진인가’라는 제목의 글[각주:1]을 올렸다. 글의 요지는 올해 출범한 ‘최민식 사진상’에 대한 당부인데, 최민식 작가를 기리며 만들어진 이 상이 사진계의 알력다툼에서 벗어나 생전 최민식 작가가 추구했던 사진론에 부합하는 작가를 공정하게 뽑아야 한다는 게 주된 내용이다. 이는 분명 옳은 지적이다. 그러나 이어서 그가 정의한 다큐멘터리 사진의 기준과 사진의 본질에 대해서는 고개를 갸우뚱하게 한다. 다음은 그의 블로그에서 발췌한 내용이다.

 이 시점에선 사진의 본질은 무엇이며 예술사진과 다큐멘터리사진의 차이는 무엇인지 규정을 해야한다. 아니 한발짝 앞서 예술사진과 다큐멘터리사진의 구분이 타당한지부터 따져야한다. 필자는 이렇게 생각한다. 다큐멘터리사진은 다큐멘터리사진가의 창작혼이 보편성을 담보로하고 내용을 갖춘다면 예술성을 획득할 수 있다. 따라서 다큐멘터리사진은 예술이 될 수 있다. 그런데 이름하여 예술사진은 절대로 다큐멘터리가 될 수 없다. 한걸음 옆으로 가서 생각하면 사진의 본질은 기록이며 기록이란 본질을 벗어나면 사진이라 할 수 없다. 예술사진이라고 이름붙이는 순간, 그것은 사진이길 포기하거나 거부한 것이다. 

이를 요약하면 곽 기자는 다큐멘터리 사진은 예술이 될 수 있으나, 소위 ‘예술사진’은 절대로 다큐멘터리가 될 수 없으며, 사진의 본질인 기록을 벗어난 사진은 그 정체성을 포기한 것이라고 주장한다. 다른 문제는 차치하고라도 사진의 본질을 기록성에만 두는 것은 편협하고 낡은 생각이다. 사진의 최초 목적이 기록을 위한 도구로써 발명된 것이긴 하지만, 사진은 발명 이후 오랜 세월을 지나면서 수많은 사진가와 이론가들에 의해 기록을 위한 도구의 틀에서 벗어나 예술로 인정받았으며 지금도 여전히 범위를 확장하고 있다. 곽 기자의 글은 매체에 대한 이해가 선행되지 않은 단편적인 시각이 담겨, 사진의 무한한 가능성을 틀에 가두고 있다.  
 사진은 어떤 매체보다도 현실을 그대로 표현한다. 이를 기록의 측면으로도 볼 수 있지만 사실 엄밀하게 따져보면 사진은 단지 어떤 현실을 가져오는(take) 기능밖에 수행하지 못하므로 사진 자체는 어떤 기호나 의미도 들어있지 않은 객관적인 것이다. 사진이 어떤 의미를 갖게 되는 건 외부에서 배경지식이나 문화적 체계가 덧붙여져 결합할 때다. 이에 대해 롤랑 바르트는 사진을 ‘코드(기호) 없는 메시지’라고 지칭한다. 이는 보도사진에서 사례를 찾을 수 있는데, 신문 정치면에 실린 여야회담 사진을 한국어와 한국정치에 대해 전혀 모르는 외국인이 본다면 이는 단지 중년의 남성(혹은 여성)이 칙칙한 정장을 입고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악수하는 모습을 찍은 것에 지나지 않는다. 이 사진을 이해하려면 캡션의 한국어를 이해할 수 있거나, 사진 속 인물들이 누구인지 알아야 한다. 코드(기호)는 이와 같은 사전 지식을 통해 사진에 결합하여 의미를 띠게 한다.  
 이렇듯 사진은 모두에게 같은 모습으로 보이지만, 같은 맥락으로 읽히지는 않는다. 반면 기록은 누구에게나 명확하게 같은 의미로 해석될 것을 담보한다. 그러므로 사진이 코드와 결합할 때는 기록의 역할을 수행할 수 있지만, 사진 자체의 본질을 기록이라 할 순 없다. 그러므로 곽 기자의 주장은 오류에 빠진다. 이어서 그의 글을 보자.

 예술이란 표현이 사진계에선 유난스러운 마술을 발휘한다. 그러므로 사진이 예술을 향해 구애의 몸부림을 치고 있는 현재, 누가 만든 표현인지 알 수도 없는 ‘예술사진’으로 구분되는 사진 중엔 진짜 사진이 없다. 말장난을 하자는 것이 아니다. 사진이 아닌 것을 사진이라고 부르는 현 상황이 개탄스럽다. (중략) 그러나 사진인구 1,000만명 시대의 한국사회에서 찍어서 나오는 사진이 아니라 만드는 사진이 대부분을 차지한다는 것은 큰 문제다. 왜 문제인가. 1,000만 명의 사진 애호가들은 의아해한다. 그들이 셔터를 아무리 열심히, 진지하게, 오랫동안 눌러도 위에 언급한 2013년도 수상자들의 사진 중 일부는 절대 생산될 수 없기 때문이다. 일부의 수상작들은 연출하지 않으면 안나오는 사진이며 또 일부의 수상작들은 유일성을 찾기 힘든, 풍경에 가까운 관념적인 사진이다. 
 
 곽 기자는 우리나라의 1,000만 사진인구가 아무리 노력해도 ‘찍을 수 없는’ 만들어진 사진, 소위 ‘예술사진’이 각종 사진상을 휩쓸고 있는 것이 문제라고 지적한다. 하지만 사진이 각각의 장르로 나뉘는 것은 기능에 의한 것이 아니라 목적에 따른 것이다. 즉 어떤 사진이 다큐멘터리임을 구분 짓는 것은 그것이 연출인지, 후보정을 했는지의 문제가 아니라 작가(촬영자)가 어떤 목적을 가지고 찍었는가에 의해서이다. 그러므로 작품의 구성이나 형식과 관계없이 어떤 진실을 밝히고 이를 알리기 위한 문제의식이 투영된다면 이는 다큐멘터리 사진의 범주에 포함될 수 있다. 이런 맥락에서 안드레아 구르스키와 토마스 루프와 같은 베허 학파 출신 작가들은 기존 다큐멘터리의 구성과 형식에서 벗어나 연출과 후보정을 자유롭게 구사하면서도 현대사회와 문명에 대한 문제의식을 드러내어 ‘유형학적 다큐멘터리’라는 새로운 다큐멘터리의 형식으로 인정받고 있다. 이처럼 오늘날의 다큐멘터리 사진은 더 이상 빈민촌에서 찍은 가슴 찡한 흑백사진만을 보여주지 않는다. 그러므로 이러한 현대사진의 흐름은 무시한 채 자신들이 원하는 스타일만을 요구하는 것은 잘못된 시각이다 
 국내 각종 사진 커뮤니티의 첫 화면에는 그곳의 사진 중 가장 잘 찍었다고 평가받는 것들이 회원들의 추천을 받아 올라온다. 그러나 이런 ‘1면 사진’들은 어떤 문제의식이나 주제에 대한 고민을 담은 사진 보다는 노출이나 구도와 같은 조형성에 집중하거나 피사체의 힘에만 의지하는, 달력사진이나 잡지 화보 같은 것들이 거의 전부를 차지한다. 이들이 추종하는 앙리 카르티에-브레송의 사진이 사진사의 위대한 업적을 남긴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고, 그의 사진을 지향하는 것도 개인의 자유지만, 그렇다고 모든 사진가가 ‘결정적 순간’을 담아야 한다고 강요해선 안 된다. 대중과 사진계가 서로 다른 곳을 바라보는 것에서 이런 균열이 생겨나지만 이를 무조건 대중의 시각에 맞춰야 하는 것은 아니다. 작가는 자신의 목소리를 작품으로 내는 사람이지, 대중의 요구에 맞춰 물건을 만들어내는 기업이 아니기 때문이다.
   
 한편 곽 기자가 짚은 한국 사진계의 고질적인 병폐들은 분명 고쳐져야 할 문제이다. 이를 위해서는 현대사진에 무지한 대중의 각성도 더불어 이뤄져야 한다. 사진애호가라면 자신의 카메라에만 시간과 돈을 쏟지 말고, 사진이론을 공부하고 사진전을 다니며 타인의 사진을 보고 판단할 수 있는 능력을 길러 사진계 권력을 가진 이들에게 대중의 존재를 부각시켜 그들과 마주 서서 비판해야 한다. 그래야 비뚤어진 한국 사진계를 바꿀 수 있다. 이러한 기반 없이 문제 해결은 남의 얘기가 될 수밖에 없다.   


최초 업로드 날짜 : 2014/05/30 20:04


  1. 곽윤섭의 사진마을, <곽기자의 사진이야기>, 9월 10일자 http://photovil.hani.co.kr/special/321595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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