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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을 기다리며, 월천리, 2010, 김성필



'솔섬'사진 저작권 공방 1심 판결, 대한항공의 승소 뒤에 가려진 것 (2)

 -'사진계 판도라의 상자'는 애초에 존재하지도 않았다.


글 이기원


 앞선 글에도 밝혔듯이 이번 ‘솔섬’ 판결에 대해 수많은 겉핥기식 기사가 쏟아지는 가운데, 웹진(?) ‘사진마을’을 운영하는 한겨레 곽윤섭 기자는 좀더 깊이있게 이 문제에 대해 다룬 글을 내놓았다(기사 링크). 그는 이번 판결이 작품 모방에 대해 (합법적인)상업적 악용을 가능케 해 기존 작가들은 굶어 죽게 될 판이라며 ‘사진계 판도라의 상자’가 열렸다는 표현까지 쓰면서 처절하게 이번 판결을 비판하고 있다.


 만약 곽 기자의 우려대로, 김성필씨의 사진이 케나의 사진을 표절한 것이라 인정받아 공근혜 갤러리 측이 승소한다면 기존 사진작가들은 아무런 피해를 받지 않을까? 나는 오히려 이것이 장기적으로는 한국 사진의 발전에 돌이킬 수 없는 족쇄를 채울 것이라고 생각한다. 같은 피사체를 찍었다는 이유만으로 표절이라고 한다면, 결국 우리나라 전 국토의 아름다운 풍경과 자연물, 유적들은 마치 부루마블 판 위의 도시들처럼 ‘땅따먹기’할 대상으로 전락할 것이다. 


 게다가 이런 땅따먹기 싸움에서 가장 유리한 위치에 있는 곳은 기존 작가들이 아니라 이미 많은 사진을 보유하고 있는 ‘게티이미지’와 같은 스톡사진 업체들이다. 그렇기에 소송에서 케나 측이 승소했다면 폰트회사가 법무법인을 통해 일반 사용자들에게 무차별적으로 저작권 고소/협박을 날리는 행태가 그대로 사진판으로 옮겨올 소지가 다분하다. 그나마도 넉넉하지 않은 우리나라 사진 작가들의 생계가 위협받는다고 해서, 그외 모든 사람의 사진찍을 자유를 박탈할 수 있다는 주장은 정당화 될 수 있는가?   



 이어서 곽 기자는 두 ‘솔섬’ 사진이 실질적 유사성이 없다는 법원 판결을 토대로 이를 배병우, 강운구 등 많은 사진가의 작업에 대입하여 이들 작가의 작품들 역시 가치가 ‘몽땅’(실제로 이 표현을 그는 쓰고 있다) 사라질 것이라고 걱정한다. 하지만 그 전에, 마이클 케나와 이들 작가를 같은 선상에 두고 논의할 수 있는지부터 따져봐야 한다. 물론 표면적으로는 마이클 케나를 비롯하여 앞서 언급한 작가들은 모두 자연 풍경이나 문화재를 주된 소재로 작업을 이어오고 있다는 공통점이 있지만, 그것은 단지 이들의 ‘교집합’일 뿐이다. 앞선 글에서 케나가 ‘솔섬’ 사진의 대표성을 띤다고 언급한 바 있지만 그렇다고 케나의 솔섬 사진이 가장 ‘유명’할지언정 가장 ‘독창적’이라고는 할 수 없다. 반면 배병우의 소나무나 강운구의 돌부처는 그 소재에서 오랜 시간과 깊은 고민을 통해 작가만의 ‘특수성(독창성)'을 인정받아왔기에 솔섬 사진들과 같은 층위에서 논의될 수 없다. 



 어떤 사진이 갖는 의미와 메시지는 프레이밍이나 피사체와 같은 사진의 표면적 요소에서만 드러나는 것이 아니다. 평생 혹은 몇십년을 한가지 주제에 몰두했던 작가의 사진을 타인이 같은 장소에서 ‘완전히’ 똑같이 찍는다고 해도 후자의 사진은 전자의 사진이 가지고 있는 내적인 가치까지 담아갈 순 없다. 당장 구글에 ‘경주 소나무’만 치더라도 배병우 작가의 소나무 사진을 닮은 수많은 이미지가 검색되지만 과연 이들 사진이 배병우 작가의 사진과 같은 가치를 가질 수 있는가?     


 이 소송에 대해, 그리고 곽 기자의 주장에 대해 좀더 좀더 친숙한 예를 들어 논의해보고 싶다. 이들 사진을 와이셔츠(드레스 셔츠)로 바꿔 생각해 보자.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와이셔츠는 단추로 앞 여밈을 하고, 목에는 카라(칼라)가 달려있으며 소매 역시 단추로 여밀 수 있게 구성되는데 누구도 이를 가지고 저작권을 요구하지 않는다. 너무나 당연하고, 보편적인 디자인이기 때문이다. 솔섬과 같은 풍경사진의 경우도 이와 같다. 김성필 씨의 사진이 마이클 케나의 사진을 표절했다고 주장하는 것은 마치 앞서 언급한 와이셔츠의 보편적 디자인 요소를 가지고 표절이라 주장하는 것과 같은 맥락이다.



 물론 모든 와이셔츠가 같은 요소로 구성돼있다고 하더라도 세부적인 차이가 있고, 가격차이도 있다. 다소 고가의 셔츠 전문 브랜드(케나의 사진을 명품 브랜드 급이라고는 생각지 않기에)가 SPA 브랜드의 셔츠에 대해 디자인 표절로 소송을 걸었다고 하면 좀더 세밀한 비유가 되겠다. 그렇다면 SPA 브랜드의 와이셔츠가 전문브랜드에 비해 가격에서 경쟁력을 가진다고 해서 전문 브랜드의 셔츠가 그 가치를 잃어버리는 상황이 가당키나 한가? 값싼 와이셔츠들이 많아진다고 해서 타격을 받는 것은 비슷한 가격대의 브랜드이지 고가의 전문브랜드가 아니다. 덕분에 디자이너 브랜드들은 이러한 싸움에 관심조차 가질 필요가 없다. 왜냐하면 같은 디자인에 같은 원단이라 할 지라도 브랜드에 따라 소비자가 더 비싼 가격을 기꺼이 지불하는 것은 그 브랜드가 가진 ‘이미지’의 가치를 인정했기 때문이고 각 브랜드 역시 자신들이 상정하는 ‘타겟층’ 즉 주 고객층이 정해져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현상은 비단 옷을 살 때만 일어나는 게 아니라 예술작품을 감상할 때 더욱 극대화된다(물론 그냥 ‘관상용’으로 거실에 걸어둘 작품은 다르겠지만). 게다가 이와같은 ‘이미지’나 부가가치가 특히 중시되는 곳이 광고계라는 점을 고려하면 곽 기자의 주장은 그야말로 기우(杞憂)라고 할 수 있다. 그가 걱정했던 판도라의 상자는 애초에 존재 하지도 않았다.


최초 업로드 날짜 : 2014/04/01 17:14

2016. 9. 26. 16:13  ·  critique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