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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존과 진화의 기로에 선 다큐멘터리 사진 - '최민식 사진상' 논란과 관련하여


박진호 사진가의 반론 - '최민식 사진상은 어디로 가야 하는가'



필자의 글에 관심과 애정을 가지고 논의를 제안한 박진호 사진가에게 반론의 내용과는 별개로 먼저 감사의 마음을 전한다. 앞으로도 사진계에서 이러한 논의가 더욱 활발히 오갈 수 있기를 희망하며 기쁜 마음으로 지난 호에 실린 박진호 사진가의 반론 최민식 사진상은 어디로 가야 하는가에 대한 재반론을 싣는다. <편집자 주>


 

박진호의 최민식 사진상은 어디로 가야 하는가에 대한 재반론


포토닷 2015년 10월호

글 이기원


*회색 부분은 원문 인용, 회색 이탤릭 부분은 반론글 인용입니다


박진호 사진가(아래 호칭 생략)는 필자의 글을 전통적 다큐멘터리 사진은 그것이 과거의 편협한 기준에 따라 제작되었기 때문에 비판 받아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으로 이해하고, 반론을 전개하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이는 명백한 오독이다. 필자는 해당 글에서 여러차례에 걸쳐 과거 통용됐던 몇몇 기준으로 동시대 사진을 규정짓고 판단하는 문제제기측의 주장 중 일부(최광호 작가가 이른바 인본주의 혹은 다큐멘터리 사진이라는 기준에 부합하지 않기 때문에 최민식 사진상 수상자로서 적합하지 않다는 입장)에 대해 문제를 제기한 것이지 과거의 다큐멘터리 사진을 부정한 것이 아니다. 또한 다른 불필요한 논쟁을 피하기 위해 부연하자면, 앞선 필자의 주장이 문제제기측의 입장에 반한다고 해서 최민식 사진상 주최측을 옹호한다거나 물타기를 하는 것 역시 아니라는 걸 분명히 짚는다. 필자는 이번 최민식 사진상 논란의 핵심이 최광호 작가의 작업이 인본주의 사진이나 다큐멘터리로 해석될 수 없기 때문이 아닌, 다른 곳(심사위원 구성과 공정성 문제 등)에 있다고 본다. 그렇기에 인본주의 사진이란 개념이 명확하게 규정되지 않은 상태에서 과거의 전통적 다큐멘터리라는 좁은 틀에 맞추어 문제제기를 하는 것이야말로 문제의 본질을 흐리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어느 쪽도 완전히 동의할 수 없는 입장이 분명 존재하는데도 이를 물타기로 규정하는 흑백논리로 바라보는 것은 부당하다.

더불어 필자는 기본적으로 오늘날 미술·사진계의 상이 작가 지원 프로그램과 같은 맥락으로 기능한다고 본다. 또한 그간 주목받지 못했거나 알려지지 않은 지금 이 시점에서 좋은 작품·작가들을 발굴하는 것이 사진상의 주된 역할이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렇기에 지금, 여기라는 동시대성은 어떤 상(심지어 공로상이라 할지라도)에서도 완전히 배제될 수 없는 상의 속성이라 할 수 있다. 더욱이 어떤 인물의 이름을 따온 상들(송건호 대학사진상, 유진스미스 기금, 로버트 카파 메달, 이중섭 미술상, 구본주 예술상, 고암 미술상, 김종영 조각상, 유재하 음악경연대회 등)을 살펴보더라도 이들이 해당 인물의 이름을 앞세우는 것은 그의 작품세계나 작품 스타일을 보존, 계승하는데 초점을 두기 보다는 넓은 맥락에서 해당 인물의 작가정신이나 태도, 업적을 기리는 데 목적을 둔다는 점을 알 수 있다. 특히 최민식 상과 마찬가지로 인본주의적 사진(Humanistic Photography)’을 모토로 제시한 유진스미스 기금(Eugene Smith Grant)의 경우 홈페이지에서 그의 인본주의 사진이 무엇인지,또한 기금의 취지는 무엇인지 서술하고 있는데, 특히 그 마지막 단락-이 기금의 취지는 유진 스미스의 사진 스타일이나 그의 특정한 관심사를 모사하는 사진가를 찾는 것이 아니다. 우리의 목적은 지금까지 그랬던 것처럼 앞으로도 자신만의 길을 개척하고 동시대의 중요한 양상을 드러내는 합당한 수상자를 찾는 것이다. (중략) 사진은 당연히 진화해야 하며, 또한 그렇게 될 것이다.’-은 이번 논란과 관련해서 시사하는 바가 깊다. 물론 원문에서도 이미 밝혔듯 사진가 최민식의 사진철학을 지향하며 인본주의를 바탕으로 작업 중인 사진가라는 모호한 공모기준의 1차적인 책임은 세심하게 공모기준을 다듬지 못한 주최 측에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이를 마치 그의 작품 스타일을 보존·계승해야 한다는 것으로 해석하는 것은 마치 유재하 음악경연대회에서 유재하 모창을 해야 그의 정신을 기리는 것이라 주장하는 것처럼 억지스럽게 느껴진다.

 

다시 반론 글로 돌아와서, 박진호가 제기한 문제들을 차례로 살펴보면, 그는 예술과 다큐멘터리의 관계에 대해 분리돼 있다고 자신있게 주장하며 이에 대한 근거로 예술과 다큐멘터리가 붙어야 할 당위성이 없다고 말한다. 이는 다큐멘터리와 예술을 1:1로 대응할 수 있는 독립적인 개념으로 바라본다는 것으로 읽히는데, 여기서 서로가 가진 개념의 차이가 무척 크다는 것을 실감했다. 하지만 이를 차치하더라도두 가지 개념이 합쳐질 당위성이 없기 때문에 분리돼 있다는 표현은 동어반복으로 느껴져 설득력이 떨어진다. 합쳐질 필요(당위성)’가 없다는 것이 두 개념이 구분되어야 한다는 주장의 근거라면, 반대로 예술의 한 분야로 존재하는 다큐멘터리를 굳이 이와 분리시켜 생각할 당위성 역시 없다고 주장할 수 있지 않을까?

이어서 그는 필자가 다큐멘터리 사진의 판별 기준으로 제시한 해석과 목적에 대해 반박을 펼친다. 그는 작품을 구성하는 요소(해석, 목적, 소재 등)들은 서로 매우 긴밀하게 연결돼 있어 분리해 해석하는 것이 쉽지 않다고 밝히고, 작품의 해석이 맨 마지막에 이루어지고 그것이 결코 단일하지 않기에 다양한 관점에서의 해석이 요청되고 수용되는 것이 예술작품의 특징이자 묘미라 말한다. 필자는 이러한 그의 입장에 전적으로 동의한다. 그러나 이어서 등장하는 문장-사진 한 장을 놓고서도 무엇을 말하면 다큐멘터리가 되고 무엇을 말하면 다큐멘터리가 되지 않을 가능성이 무궁무진해진다는 것! 사람마다 달라지는 정도가 아니라 같은 한 사람이 두 마디 말만 해도 장르가 바뀔 판이다. 이래도 해석 목적만이 다큐멘터리 사진을 판별할 수 있는 기준의 기능을 갖는다고 계속 주장할 수 있을까?”-은 고개를 갸우뚱하게 한다. 이는 그가 바로 직전에 밝힌 예술작품의 특징, ‘다양한 관점에서의 해석이 요청되고 수용되는 것과 모순되어 스스로를 반박하는 듯한 인상을 주기 때문이다. 그의 주장대로 예술작품은 다양한 관점에 따라 해석될 수 있는 것이 그 특징이다. 그렇기에 당연하게도 사진 한 장을 놓고서도 이를 어떤 관점에서 보느냐에 따라 다큐멘터리가 되었다가, 또 다큐멘터리가 아닌 다른 것으로 해석될 가능성이 존재한다. 다시 그의 표현을 빌리자면, 한 사람이 두 마디 말만 해도 장르가 바뀔 수 있는 것이 예술작품의 특징인 것이다. 이를 근거할 사례를 들어보자면. 먼저 모두가 잘 알고 있는 전몽각 작가의 윤미네 집 사진을 떠올려 볼 수 있다. 이는 각각의 사진만 놓고 보면 60~80년대를 살아온 누군가의 가족 앨범 사진과 다르지 않다. 또한 작가는 처음부터 윤미네 집을 예술작품 시리즈로 의도하고 시작한 것이 아니지만, 이것이 윤미씨의 출생부터 결혼까지의 26년을 기록해온 가족앨범인 동시에 당대의 평범한 개인과 가족의 삶을 비춰주는 다큐멘터리이자 예술작품으로 작동한다는 해석에 누구도 이의를 제기할 수 없을 것이다. 더불어 좀더 최근의 사례를 들어보면, 안세홍 작가의 <겹겹 - 지울 수 없는 흔적>(15.8.4~16, 류가헌)에 전시됐던 한 일본군 피해자 할머니의 어릴적 증명사진이나, 최근 등장하는 여러 아카이브 전시를 구성하는 작품(소품, 자료사진 등)을 꼽을 수 있겠다.

 

이어서 박진호가 필자의 모든 다큐멘터리는 이미 예술이란 문장을 인용하며 시작하는 단락은 다소 악의적으로까지 느껴진다. 그가 해당 글의 맥락을 무시하고 본인이 지적하기 편한 부분만을 의도적으로 뽑아냈다는 의심을 거두기 어렵기 때문이다. 원문의 내용은 앞서 그가 인용한 부분과는 의미가 사뭇 다른데, 박진호가 발췌한 문장의 원문을 보면 모든 다큐멘터리 사진들은 이미 예술의 범주에 놓여 있지만, 다만 그것이 예술작품으로서 얼마나 가치가 있느냐는 별개의 사항이다.”라고 마무리된다. 물론 위 문장만 놓고 보면 그 표현에 오해의 소지가 있음을 인정한다. 하지만 필자는 같은 단락의 앞선 문장에서 모든 사진은 이미 예술에 범주에 놓일 수 있는 가능성을 갖게 된다.”고 서술한 바 있다. 또한 문맥 전반을 놓고 보더라도 필자가 모든 다큐멘터리는 이미 예술이라 규정했다고 보는 것은 다소 무리가 있는 해석이다. ‘예술이 될 수 있는 가능성을 갖는 것 이미 예술이라는 표현은 분명 그 의미나 방향성이 다르기 때문이다.

이러한 왜곡을 차치하고 박진호가 논리 비약이 심했다며 던지는 물음 내셔널 지오그래픽도 예술잡지인가?”에 대한 답변을 해보자면, 당연히 내셔널 지오그래픽에 실리는 사진이나 동물의 왕국 다큐멘터리도 작가에 의해 선택되어 작품으로 구성된다거나, 기획자의 의도에 맞게 취합되어 전시로 꾸려지는 등 의미가 더해지면 충분히 예술작품으로 기능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원문에서 밝혔듯, 모든 사진은 맥락에 따라 예술이 될 수 있는 가능성을 갖기 때문이다. 앞서 언급한 윤미네 집이나 아카이브 전시를 구성하는 자료들이 예술작품이자 다큐멘터리로 인식될 수 있었던 것 역시 바로 이런 이유에서이다. 또한 내셔널 지오그래픽의 사진들이 그 자체로 블록버스터 전시화되어, 매번 꽤 많은 관람객을 모아 왔다는 걸 고려하면 박진호가 생각하는 예술작품이나 다큐멘터리의 개념이 필자와는 무척 다르다는 걸 또 한번 느낄 수 있었다. 물론 필자는 그가 가진 예술에 대한 해석을 부정할 생각이 없다. ‘예술작품’의 기준이나 범주에 대해 서로 다른 의견을 가질 수 있는 이유는 그것이 하나의 의미로 정의될 수 없는, 시대나 상황에 따라 변화하는 열린 개념이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알타미라 동굴벽화나 마르셀 뒤샹(Marcel Duchamp) (Fontaine)’을 돌에 새긴 낙서나 공산품으로서의 변기가 아닌 가치있는 예술작품으로 바라볼 수 있다는 점을 생각해봤으면 한다.      

 

끝으로 박진호가 반론 말미에서 제기한 부분 역시 오독의 혐의를 지울 수 없다. 박진호는 필자가 원문에서 앞으로의 최민식 사진상에 대해 당부한 대목인 최민식상은 (중략넓은 범주에서 다큐멘터리라는 표현형식을 통해 사회문제의 근본적 원인이나 부조리를 드러내는 작가를 격려하고 지원하는 매개체가 되어야 한다.”를 이번 수상자인 최광호 작가의 작업과 연결지어 그것이 앞서 밝힌 내용과 부합하지 않기 때문에 필자가 애써 이어온 논지를 흐렸다고 주장하는데, 필자로서는 어떻게 앞으로의 방향성에 대한 당부를 이미 지나간 수상자 작품에 대한 해석으로 읽어낼 수 있는지 의아하다. 더불어 박진호는 만일 새로운 다큐멘터리 사진의 개념에 부합하는 독창적이고 독보적인 작가가 등장하여 그를 치하해야 한다면, 그런 상이 필요하다면, 필요성을 느끼는 사람들이 성격에 맞는 또 다른 상을 만들면 되는 것이다.”라는 주장으로 반론을 마무리하고 있는데, 최민식상 뿐만 아니라 어떤 상이든 공모요강이나 후보 선정의 기준(국적, 연령, 매체)을 통해 상의 정체성을 형성할 순 있다. 하지만 인본주의 사진과 같은 주관적이고 명확하게 합의되지 않은 개념을 기준으로 그 출발점부터 특정 성향이나 범주의 작업·작가를 후보에서 배척하고자 한다면 장기적으로 봤을 때, 결국 또 다른 그들만의 리그가 될 수밖에 없다는 걸 간과하지는 않았는지 반문하며 재반론을 마친다.



      각주

    1. 해당 단락의 원문을 함께 싣는다. 
      The intention of this Grant has never been to find photographers who replicate Smith’s particular preoccupations or his photographic style. It has been, and continues to be, to find worthy recipients who in their own way will explore and report upon aspects of the contemporary world that are of significant importance. The Grant is given to allow photographers to escape from the increasingly formulaic demands of the mass media. The photography, as it should, will evolve. 출처 http://smithfund.org/humanistic-photography
    2. ‘아카이브 전시’의 대표적 사례로는 2012년부터 3부작으로 나눠 열린 <서울사진축제>나 일민미술관의 <토탈리콜>(2013), <다음 문장을 읽으시오>(2014), <우주생활>(2015), 서울역사박물관의 <홍순태 서울사진아카이브 : 세 개의 방>(2015)을 꼽을 수 있다.


2016. 9. 26. 16:38  ·  critique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