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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두리 사진 보고서> 제7호

*변두리 사진 보고서는 우리의 일상에서 마주하는 사진들이 어떻게 소비되고 작동하는지에 대해 다루는 연재물입니다



ⓒ이의록,저것일 수 있었던 다름 아닌 이것, 9.5×13cm, 리소스텐실, 2014


보존과 진화의 기로에 선 다큐멘터리 사진

최민식 사진상 논란과 관련하여

 

이기원

포토닷 2015년 8월호

 

일찍이 사람들은 사진이 예술이냐는 물음에 많은 통찰력을 쓸데 없이 쏟아 부었다. 그러나 그들은 정작 이에 선행되어야 할 물음, 즉 사진의 발명으로 인해 예술의 성격 전체가 바뀐 것이 아닐까 하는 물음은 제기하지 않았다.1) 

 

사진을 공부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한번쯤 읽어봤거나 책장 한 구석을 차지하고 있을 발터 벤야민의 기술복제 시대의 예술작품에 등장하는 이 문장은 과거 사진이 예술이 될 수 있는가 라는 논쟁에 대한 벤야민의 입장을 대변한다. 그리고 위 문장의 사진이라는 단어를 다큐멘터리 사진으로 치환한다면 최근 최민식 사진상을 둘러싼 논란의 한 축으로 작용하는 최민식 작가의 인본주의 사진철학을 비롯한 다큐멘터리 사진의 정체성에 대한 논의로 연결된다. 이번 글에서는 논란이 되고 있는 여러 문제들 중 공모 기준으로서 다큐멘터리 사진이나 인본주의 사진이 어떻게 해석, 규정되어야 하는지에 대해 다뤄보고자 한다.

물론 이 문제를 둘러싼 가장 1차적인 책임은 다큐멘터리 사진이나 인본주의 사진이라는 작품에 대한 해석을 사진상의 심사 기준으로 삼은 주최측에 있다. 하지만 그보다 더 큰 문제는 과거의 편협한 기준으로 다큐멘터리 사진을 규정짓고 이를 동시대 사진에 그대로 적용시키려는 입장을 가진 사람들이다.이와 관련해 이들이 주장하는 바의 핵심인 다큐멘터리 사진은 예술이 될 수 있지만 예술사진은 다큐멘터리가 될 수 없다는 말은 예술과 다큐멘터리를 분리시키는 시대착오적 인식일 뿐만 아니라, 다큐멘터리를 해석이나 표현방식이 아닌 형식으로 제한하는 오류를 포함한다.

물론 앞선 주장은 예술로서의 사진이 인정받지 못했던 때에는 통용될 수 있었던 개념일지 모른다. 하지만 사진이 더 이상 특정한 누군가의 특별한 기술이 될 수 없는 동시대에 비춰보면 이러한 인식은 다큐멘터리 사진을 마치 한국화가 그랬던 것처럼 자신의 영역을 더 이상 확장, 발전시키지 못하고 보존, 계승과 같이 보호되어야 할 근대전통문화로만 머물게 할 우려를 안고 있다. 또한 이미 다큐멘터리 사진의 영역이 점점 확장되고 표현방식 역시 다양해지고 있다는 점을 고려하면, 이를 과거의 잣대로 규정짓고 감별하려는 것은 마치 아직 자라날 무한한 가능성이 있는 살아있는 생명 죽은 것으로 판명하고 제사를 지내며 추모하라는 것과 같다.

 

피사체에 의한 분류에서 표현에 따른 구분으로

 

과거에는 사진과 카메라가 그 자체로 귀하고, 카메라를 들고 사진을 지속적으로 찍을 수 있는 사람은 이보다 훨씬 더 높은 희소가치를 가질 수 있었던 점을 고려하면, ‘인물사진’, ‘풍경사진 등과 같이 사진에 무엇이 찍혔는가(피사체)에 따라 사진을 분류하는 것은 어찌보면 당연하게 느껴진다. 과거에는 그저 아름다운 자연풍경을 찍은 사진만으로도 사람들의 시선과 관심을 끌기에 충분했고 그런 작업만으로도 예술가의 지위에 오를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디지털 사진과 스마트폰의 등장으로 모든 사람이 카메라를 소유하고, 누구나 메모하듯 사진을 찍을 수 있는 요즘의 세태에 비춰 사진을 피사체에 따른 분류로만 나누는 것은 그 한계가 명확하다. 과거에는 그저 어떤 피사체를 집요하게 다룬 것만으로도 가치있는 작품으로 작용할 수 있었지만, 동시대 시각예술에서는 그 집요함을 뒷받침할 설득력이 없다면 그것을 좋은 작품이라 말할 수 없다. 또한 자신이 왜 고집스럽게 사진만을 통해 작업을 선보이는지에 대한 나름의 이유 역시 필요하다. 이는 사진을 바라보는 기준점이 피사체에서 사진으로 무엇을 말하려 하는지에 대한 표현으로 이동하고 나아가 그것이 사진이라는 매체에 한정되는 것이 아니라 시각예술이라는 폭넓은 범주에서 논의되어야 함을 시사한다.

 

형식이 아닌 해석으로서의 다큐멘터리

 

앞서 밝혔듯 과거의 다큐멘터리 사진은 사진가의 발걸음이 어디를 향했고, 그의 카메라가 필름에 무엇을 담아냈느냐에 따른 기록성을 통해 다큐멘터리로 작동할 수 있는지의 여부가 판가름났다. 즉 어떤 사건을 사진으로 기록하기 위한 다큐멘터리이기 때문에 사진 자체의 힘에 기댈 수 밖에 없는 요소가 존재했다. 그러나 동시대의 다큐멘터리 사진이란, 어떤 사건에 대한 기록과 의미전달을 위해 선택된 매체로서의 사진이어야 한다. 다시 말해 왜 이것을 굳이 사진으로 기록해야 하는가?’를 짚고 넘어가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기에 과거에 통용되던 기준을 오늘날의 달라진 사진 환경에 끼워넣다보면, 본능적으로 시선을 끄는 피사체에만 의존하는 피사체 지상주의나 마찬가지로 한 장의 사진으로 모든 것을 설명하려고 하는 걸작주의’, ‘결정적 순간과 같은 회화적 조형성에 집착하는 사진 등과 같은 부작용이 발생할 수밖에 없다. 이는 나아가 하나의 신화화된 전형적 다큐멘터리 사진을 형성했는데, 이는 연출은 물론이고 포토샵을 통한 보정에서부터 크롭과 같은 사소한 편집까지 금기시하는 스트레이트 사진에 대한 강박과 사회적 맥락과 관계없이 남들이 찍지 못한(않는) 피사체만을 찾는 소재주의로 대표된다. 더불어 이런 전형적 다큐멘터리의 또 다른 문제는 어떤 사회현상이나 사건의 근본적 원인인 사회구조에 대한 이야기를 담아내기보다는 그저 불우한 개인의 삶이라는 현상을 조형적으로 포착하는데만 초점을 맞춘다는 것이다.

물론 필자는 과거의 다큐멘터리 사진을 부정하지 않는다. 하지만 과거의 기준에서 의미 있는 작품을 끄집어내 오늘날의 잣대로 재규정하는 것은 무척 어리석은 일이라 생각한다. 또한 그 반대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예컨대 2015년에 만들어진 작품을 60~70년대의 기준으로 평가하고 그것이 다큐멘터리가 맞는지 아닌지를 감별하는 행위는 어리석음을 넘어서 폭력적인 일이라 할 수 있다. 어떤 사진을 놓고 다큐멘터리 사진임을 판별할 수 있는 기준은 그것이어떻게 찍었고’, ‘무엇을 찍었는가를 통해 규정되는 것이 아니라 그 사진을 통해 무엇을 말하는지 라는 해석과 목적에 맞춰져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어떤 사진이 컴퓨터로 만들어진 사진인지 ‘(공개적으로)연출된 사진인지의 여부는 그 타당성만 있다면 그것이 다큐멘터리 사진으로 작용하는데 있어 어떤 제한도 될 수 없다.

 

예술사진이라는 동어반복

 

앞서 언급했듯 일각에서는 다큐멘터리 사진을 예술사진과 분리시켜 전자는 후자로서 기능할 수 있지만, 어떤 예술사진도 절대 다큐멘터리가 될 수 없다는 주장을 고수하고 있는데, 이는 그 자체로도 논리적 오류일 뿐 아니라 동시대 시각예술에서 사진이 차지하는 위치와 맥락에 대한 이해가 결여된 인식이라 할 수 있다. 먼저 이들의 가장 큰 오류는 예술사진이라는 용어에 있다. 이미 오래전에 현대미술의 범주는 모든 시각예술 매체뿐만 아니라 퍼포먼스나 사운드 아트까지 광범위하게 포괄하는 개념으로 자리 잡았다. 이런 맥락에서 모든 사진은 이미 예술의 범주에 놓일 수 있는 가능성을 갖게 된다. 그러므로 그것이 무엇을, 어떻게 찍었는가와는 상관없이 왜 찍었는가라는 작가의 의도가 명확하거나 설령 작가의 의도가 명확치 않다 하더라도 이것이 다른 누군가에 의해 술작품으로 재맥락화2)될 수 있다면 이는 충분히 예술작품으로 작동할 수 있고, 나아가 이 작품이 어떤 주제를 다뤘는지에 따라 

큐멘터리’라 해석될 수 있다. 그렇기에 모든 사진이 예술작품이 될 수 있는 가능성이 열려있는 동시대에 ‘예술사진’이라는 용어는 마치 ‘예술회화’나 ‘예술조각’이라는 단어처럼 그저 동어반복에 불과하다. 정리하자면 모든 다큐멘터리 사진들은 이미 예술의 범주에 놓여 있지만, 다만 그것이 예술작품으로서 얼마나 가치가 있느냐는 별개의 사항이다. 결국 다큐멘터리를 예술과 분리시켜 규정짓는 것은 ‘다큐멘터리 고유의 영역’을 만든다기보다는 스스로의 가치를 끌어내리는 것과 같다. 이런 맥락에서 (그들이 말하는)고유한 영역을 위해 ‘다큐멘터리의 순수성’이나 ‘인본주의 사진철학’과 같은 모호한 개념이나 과거의 사례만을 들이대는 것은 다큐멘터리 사진이 발전하고 확장될 수 있는 가능성을 무시하고 그저 ‘보존되어야 할’ 근대전통문화의 유산으로 제한하는 치명적인 착오가 될 수 있다. 


최민식 사진상은 최민식 작가의 스타일을 계승하는 사진가에게 주는 문화유산 보존의 목적이 아닌, 넓은 범주에서 다큐멘터리라는 표현방식을 통해 사회문제의 근본적 원인이나 부조리를 드러내는 작가를 격려하고 지원하는 매개체가 되어야 한다. 몇 가지 편협한 기준으로 최민식 작가의 사진 스타일을 규정짓고, 이를 계승하길 강요하는 것은 그들이 말하는 다큐멘터리 사진을 특정 세력의 도움 없이는 스스로 살아남을 수 없게 만들 것이다. 이는 결국‘SLR 클럽 스타일이나 사협 스타일이라는 용어가 존재하는 것처럼 최민식 사진상 스타일이라는, 진정으로 작가의 이름을 욕되게 만드는 결과를 낳을지도 모른다.




이의록, '저것일 수 있었던 다름아닌 이것' <지금여기, 장님 코끼리 만지듯> 전시전경


이의록 작가의 저것일 수 있었던 다름 아닌 이것 1960 4.19부터 1990년대 한총련 사태에 이르기까지 시위, 사태에 관련한 보도사진에서 익명의 존재들로 남아있는 개인의 얼굴들을 확대하여 같은 선상에 재배치하는 작업이다. 이를 통해 작가는 민주화 기록 이미지 속에 잔존하는 민중에 대한 이야기를 풀어 놓는다. 특히 본래 사진에서 서로 다른 규칙, 경계에 놓였던 사람들을 재배열하면서 역사와 사회 속에서 한 개인이 어떤 의미를 가지는지 고민하게 한다. 이는 작가가 직접 찍은 것도 아니며 인화지에 프린트한 (전통적)사진도 아니지만 누구도 부정할 수 없이 확실한 건 이것이 한국의 근대사를 조명하고 물음을 던지는 다큐멘터리 사진으로 작동할 수 있다는 점이다. 이처럼 다큐멘터리 사진은 그 형식을 통해 규정되는 것이 아니라, 표현을 통해 해석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이외에도 국내의 많은 젊은 작가들은 새로운 다큐멘터리의 방향성을 모색하고 있다.  


각주

1 : 발터 벤야민, ‘기술복제시대의 예술작품’, 최성만 역, 도서출판 길, 2007, 61.

2 : 작가의 의도와 관계없이 예술작품으로 맥락화된 사례로는 전몽각의 윤미네 집이나 지난 2월 일민미술관에서 열렸던 <우주생활>전의 NASA 아카이브 사진 등을 들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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