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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두리 사진 보고서> 제9호

*변두리 사진 보고서는 우리의 일상에서 마주하는 사진들이 어떻게 소비되고 작동하는지에 대해 다루는 연재물입니다.

 

무엇이 세상을 바꾸는 사진을 만드는가

시리아 난민이 담긴 두 장의 사진을 보며


글 이기원

포토닷 2015년 10월호

 


때론 한 장의 사진이 백 마디의 말이나 글보다 쉽게 사람의 마음을 움직인다는 걸 우린 모두 알고 있다. 또한 그중에서도 어떤 사진은 다른 사진들보다 훨씬 더 강력하게 작용하며 역사에 남겨져 세상을 바꾼 사진이라 불린다. 베트남전 종식의 계기가 되었다고 전해지는 이른바 네이팜탄 소녀 사진이나 천안문 사태 당시 탱크 행렬을 홀로 막아선 청년의 일명 탱크맨 사진, 6월 항쟁을 촉발시킨 이한열 열사의 사진 등을 세상을 바꾼 사진의 사례로 들 수 있겠다. 이들 사진은 모두 어떤 역사적 사건을 대표하는 이미지가 되었는데, 공교롭게도 이들 중 대다수는 누군가의 고통이 그대로 담겨있는, 그 자체로 마음 아픈 사진이기도 하다. 이러한 해석은 최근 유럽의 난민정책을 전향적으로 변화시키고 전 세계인에게 시리아 난민 문제를 알렸다고 평가받는 시리아 난민 꼬마 아일란 쿠르디의 죽음을 보여주는 사진에서도 유효한 것으로 보인다. 그렇다면 과연 무엇이 한 장의 사진을 세상을 바꿀 수 있는 사진으로 만들어주는 것일까? 사진의 파급력과 영향력은 사진에 실린 고통의 무게에 따라 달라진다고 볼 수 있을까? 그리고 어쩌면 세상을 바꿀 수 있는 사진 역시 시대에 따라 그 양상이 변화하는 것이 아닐까?

 

시각적 자극에 무뎌지고 또 지쳐버린 현대사회

 

세상을 바꾼 사진을 이야기하기에 앞서, 먼저 짚어봐야 할 것은 우리가 타인의 고통이 담긴 사진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있는가에 대해서다. 디지털 사진의 등장으로 예전만큼 카메라와 사진이 귀한 것이 아니게 되면서 우리가 마주하는 사진의 양 역시 폭발적으로 증가했다. 그리고 다소 아이러니하면서도 어쩌면 당연하게도, 사진이 많아지고 흔해진 만큼 우리가 하나의 이미지에서 느끼는 자극이나 감동은 크게 줄어들었다. 덕분에 어느 순간부터 일상을 둘러싸고 있는 사진들 역시 더 새롭고, 크고, 다양한 자극을 주는 방향으로 끊임없이 변화하고 있다. 이러한 흐름은 태생적으로 사람들의 시선을 끄는 것을 목표로 삼는 보도사진이나 광고사진 뿐 아니라, 거의 모든 영역의 사진에서 동시에 벌어지고 있다고 봐도 무방하다. 가령 디지털카메라가 대중화되기 전까지 음식사진이란 말은 그저 상업사진에서만 쓰였던 표현이었다. 하지만 이제는 어느새부터 음식이 나오면 수저보다 카메라를 드는 것이 전혀 어색하지 않은 일이 되었고, 나아가 최근에는 푸드 포르노(Food Porn)’라 불리는 음식사진들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푸드 포르노라는 표현의 등장이 의미하는 것처럼, 자극의 한계 역시 분명 존재한다. 사람들은 자극에 무뎌지는 동시에 지쳐버렸기 때문이다.

이런 맥락에서 재난과 사건·사고로 대표되는 가장 민감한 형태의 자극을 다루는 보도사진은 자극을 이용한다는 측면에서 보도윤리와 언론의 선정성 사이의 딜레마에 빠진다. 그리고 어느 때부터인가 언론사들은 이런 딜레마에 빠져들 때마다 모자이크 처리라는 카드를 집어든다. 물론 우리가 각종 이미지로부터 받는 자극의 상한선은 서서히 높아지고 있긴 하지만, 뉴스의 맥락과 관계없거나 과도한 자극(직관적으로 혐오스럽거나 잔혹한 것)의 경우 여전히 모자이크를 통해 통제가 이루어지고 있다. 하지만 우리가 모자이크에 가려진 사진을 보지 못한다고 해서 해당 사건이나 문제에 공감하지 못한다고 단정지을 순 없다. 마치 IS(이슬람 국가)가 공개하는 참수 영상과 같은 것이 우리에게 직접적으로 당도하지 않는다고 해서 IS에 대한 우리의 인식이 너그러워질 수 없는 것처럼 말이다. 그러나 모자이크 처리에 대한 하한선의 경우, 이는 언론사의 책임회피의 수단으로 변질된 모습을 보이기도 한다. 또한 최근 등장하는 어떤 사진들은 모자이크 유·무의 판단이 애매한 지점에 위치하기도 한다.

 

책임회피와 공감 사이에 놓인 모자이크

 

이번 시리아 난민 꼬마 아일란 사진의 경우, 일부 국내 언론사들이 처음에는 모자이크 처리 없이 공개했던 아일란의 사진을 모자이크 처리해 보도한 것은 분명 나름대로의 고민을 거쳐 결정된 것이겠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혹시 모를 문제에 대한 책임회피를 염두한 안전한 선택을 취한 것으로 보이기도 한다.하지만 확실한 것은, 새로이 등장하는 세상을 바꿀 사진들이 모자이크의 유무와는 관계없이 작동하는 방향으로 변화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아일란의 사진에서 그 바깥에 위치한 모든 정보를 배제하고 사진의 표면만을 건조하게 바라보면, 이는 전혀 자극적이거나, 슬픈 사진이 아니란 걸 알 수 있다. 그저 한 어린아이가 조금은 불편해 보이는 자세로 해안가에 넘어져 있는, 어떤 측면에서는 뛰다가 넘어진 순간을 포착한 것처럼 보이기도 하는 사진이기 때문이다. 이는 분명 지금까지 역사에 남았던 타인의 고통이 담긴 사진들과는 다른 작동방식을 가지고 있다. 물론 모든 사진에는 표면에 드러나지 않는 맥락이 존재하지만, 과거의 사례에서는 상대적으로 사진의 표면에서 즉각적으로 읽어낼 수 있는 요소의 비중이 높았다. 앞서 언급했던 네이팜탄 소녀사진이나 탱크맨’, 이한열 열사의 사진은 모두 그 배경정보를 알지 못하더라도 시각적인 정보만으로 어느정도 사진 속의 고통을 읽어낼 수 있는 것처럼 말이다.

그렇기에 우리는 아일란의 사진을 지금까지의 타인의 고통이 담긴 사진을 바라볼 때와는 다른 방식으로 이해해야 한다. 이런 측면에서 아일란의 사진이 실린 SNS나 온라인뉴스에서 해당 기사의 리플을 통해 모자이크 유무에 대한 논쟁이 유독 거세게 일고 있는 것은 어쩌면 사진을 이해하는 방식의 변화과정에서 생겨나는 시행착오와 같은 것으로 보이기도 한다. 좀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모자이크는 분명 그 자체로 사진의 맥락을 뒤바꿀 힘을 가지고 있지만 모자이크의 유무가 세상을 바꿀 사진과 그러지 못했던 사진을 구분하는 기준으로서는 더 이상 작동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타인의 고통을 우리는 어떻게 바라봐야 하는가

 

앞서 살펴본 바와 같이 세상을 바꾸는 사진의 기준과 양상이 과거와는 차츰 다르게 작용하고 있다. 이는 해당 사건의 당사자나 현장의 사진가에게는 굉장히 잔인하고 무심한 말로 들리겠지만, 시각적 자극에 무뎌질대로 무뎌지고 또 이에 지쳐버린 사람들에게 더 이상 시각적인 자극, ‘스트레이트한 재난 사진이 갖는 관심과 공감의 힘은 분명 과거와 다르다. 오히려 사진 표면에서 바로 읽어낼 수 없는, 겉으로 드러나지 않는 맥락이 존재하는 사진들이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이고 있다. 이러한 변화는 지난 4, SNS를 중심으로 잠시간 주목받았던 시리아 난민 캠프의 한 어린이 사진의 사례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시리아 난민 캠프의 후디아라는 이름의 여자아이는 한 사진가가 사진을 찍기 위해 다가가자 시커멓고 길쭉한 카메라를 총으로 오해하고 항복의 표시로 두 손을 들었다. 이 사진은 온라인을 통해 널리 공유됐고 많은 사람들의 안타까움을 자아냈다. 이는 비록 아일란만큼의 파급력은 갖지 못했지만, 시리아 사태에 대한 심각성을 많은 사람들에게 인지시킨 바 있었다. 그렇다면 후디아의 사진이 아일란만큼의 파급력을 갖지 못했던 것이 그저 사진에 담긴 고통의 무게가 다르기 때문이라 단정할 수 있을까? 필자는 차마 그렇게 생각하고 싶진 않다. 누군가의 고통의 무게를 타인이 측정하고 비교하는 것은 너무나 무책임하고 잔인한 일일 뿐더러 우리는 절대로 당사자의 고통과 슬픔을 완전히 헤아릴 수 없기 때문이다. 이와 관련해서 지난 411일 세월호 1주기 추모 사진포럼 재난 시대의 사진에서 김현호 사진평론가가 발표한 귀환하는 슬픔과 흩어져 사라질 슬픔의 한 단락은 지금 이 시점에서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

그것(슬픔)이 아무리 크고 막막하다고 해도 찍히는 이들보다 먼저 울거나 위로받아서는 안 된다. 나는 당신이 지닌 슬픔의 아득함과 섬뜩함을 믿는다.하지만 언젠가 사라질 슬픔은 끊임없이 귀환할 슬픔에 대한 예의를 갖추어야 한다. 울고 있는 자신의 모습을 사랑해서는 안 된다.(1)       

 

 

사진은 세상을 바꿀 수 있을까

 

아일란의 사진이 유럽 국가들의 난민 정책을 바꾸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면, 도대체 후디아의 사진은 무엇이 부족해 이러한 변화를 이끌어내지 못한 것일까? 또한 세월호 안팎에서 찍혔던 수많은 사진들이 여전히 세상을 바꾸지 못하고 있는 것은 이 사진들이 다른 세상을 바꾼 사진에 비해 뭔가가 부족했기 때문이라 할 수 있는 것일까? 이런 측면에서, ‘세상을 바꾼 사진들은 원인으로 작용하기보다는 결과적으로 붙여진 해석처럼 느껴진다. 이런 사진을 찍었던 그 누구도 셔터를 누를 당시부터 그것이 세상을 바꾸게 될 것이라는 확신에 도달하지 못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특히 세상을 바꿀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한 사진들이 결국 그 목적을 달성하지 못하고 잊혀진 무수한 경우를 떠올리면, 사진 한 장 때문에 세상이 바뀌었다기보다는 세상이 바뀔, 혹은 바뀌어야 할 시기에 등장한 어떤 사진이 해당 문제에 대한 상징처럼 작용하면서 그 후 일어난 변화에 대한 여러가지 계기 중 하나로 작동했다고 볼 수 있다. 어떤 사건에 대한 상징으로서의 사진은 세상을 바꿀 수 있는 실제적인 힘을 가진 사람이나 집단(주로 정치인이나 지도자, 관료)에게 그들의 변화된 결단의 이유에 대해 던져지는 왜 이제서야?’라는 반문을 피해갈 좋은 답변이자 핑계거리가 된다.

물론 지나간 일에 만약에라는 가정을 붙이는 건 무의미한 일이지만, 만약 후디아의 사진이 알려졌을 때 지금과 같은 반응과 변화가 일어났다면 어땠을까? 그렇다면 아일란을 비롯한 수많은 사람들이 헛되이 죽음을 맞지 않고 삶을 이어갈 수도 있지 않았을까? 바로 이러한 지점에서 사진이 세상을 바꿀 수 있는가라는 물음에 대한 답은 나와 있다. 후디아의 사진이 그랬듯이, 비통하고 애석하게도 세월호를 다룬 수많은 사진들이 그 표면과 맥락 모두에서 우리에게 큰 슬픔을 던져주었음에도 불구하고 (아직까지) 세상을 바꾸지 못하고 있는 것은 사진의 책임이 아니다. 우리는 사진에 각자의 책임과 기대를 떠넘겨서는 안 된다.


각주

(1) : 김현호, ‘귀환하는 슬픔과 흩어져 사라질 슬픔’, 세월호 1주기 사진 포럼 자료집 <재난시대의 사진>, 20.

 



터키의 사진가 오스만 샤길리(Osman Sağırlı)(영문표기 : Osman Sagirli)가 지난해 12월 시리아 북부 난민촌에서 찍은 소녀 후디아(Hudea)의 사진.후디아는 샤길리의 카메라를 총으로 오해하고 겁에 질려 두 손을 들었다. 이 사진은 올해 초 터키 신문을 통해 보도되었다가 지난 4월 트위터를 통해 전파되면서 널리 알려진 바 있다.

 

2016. 9. 26. 16:39  ·  critique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