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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ggy_one 이기원이 보고, 쓴 것들을 분류해 둡니다.




최하늘 개인전 <No Shadow Saber>(합정지구, 2017)과 연계한 책 'Leviticus'에 실은 원고입니다. 시청각에서 기획/편집을 진행했고, 신신의 신동혁 디자이너가 디자인을 맡았습니다.

작가가 던진 질문을 답하는 형식을 제안받았고, 이에 맞춰 평면의 이면은 가능한지, 이미지는 두께를 가질 수 있는지에 대해 생각해 보았습니다. 비록 작가의 작품/전시를 직접 이야기하진 않지만, 최하늘의 작품과 전시를 보지 못했다면 나올 수 없었던 글이기도 합니다. 





0으로 수렴하지만 0은 아닌 것

글 이기원

 

0. 내가 받은 질문은 이렇다.


평면의 이면은 가능할까요? 이미지는 두께를 가질 수 있을까요? 회화나 사진, 영상 또는 그 매체의 표면인 이미지의 이면과 두께, 또는 숨겨진 단면에 대한 이야기가 궁금합니다. 평면의 이면과 이미지의 두께에 대해 생각하고 상상하는 것 역시 조각에 대한 이야기가 될 수 있을 테니까요. 어쩌면 조각과 전혀 상관없는 이야기가 될 수도 있겠습니다.


평면과 이미지, 그러니까 둘 다 관념적으로 떠올리는 개념으로서의 평면과 이미지라면 우리는 이것의 이면을 확인하거나, 두께를 측정할 수는 없다. 하지만 그것의 두께나 이면을 상상해 볼 수 있고, 이러한 상상이 가능하다면 그다음 논의로 넘어갈 수 있다. 그렇다면 우리가 상상할 수 있는 ‘이미지의 두께 또는 이면’이 어떤 것들이 있을까?



1. 먼저 머릿속에 어떤 특정한 이미지가 아니라, 이미지 일반으로서 존재하는 ‘이미지의 이데아’ 같은 것을 떠올려 보자. 이것은 머릿속에서 얼마든지 변형/재가공 될 수 있고 어쩌면 영상처럼 스스로 움직일 수도 있다. 여기서는 무엇이든지 가능하다. 두께를 마음대로 늘려볼 수도 있고, 그 이면은 어떤 모습인지, 또한 그것이 어떤 질감을 가졌는지도 상상해 볼 수 있다. 이렇게 관념 속에서는 무엇이든 생각해볼 수 있기에, 바로 같은 이유로 이런 이미지만을 놓고 이야기하는 것은 다소 무의미하다. 우리에겐 각자의 머릿속에 있는 무언가를 공유하며 함께 이야기해볼 장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두뇌 바깥으로 출력할 수 없는 데이터만으로 논의를 끌고 가는 것은 너무 공허한 일이다.



2. 다음으로 떠올려볼 것은, 포토샵의 캔버스와 같은 액정화면 속 이미지다. 이는 머릿속에서 떠올리고 상상할 수 있는 대부분의 활동을 구현할 수 있다. 어쩌면 우리가 머릿속에서 이미지를 돌려볼 수 있게 하는 감각이 포토샵 덕분에 만들어졌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도 든다. 어쨌거나, jpg나 ai, indd, psd 등과 같은 확장자를 지닌 파일들은 컴퓨터 프로그램 내에서 머릿속 이미지만큼이나 절대적인 이미지로 존재한다. 그것의 뒷면이나 두께가 어떤 모습이고 얼마나 두꺼운지 ‘측정’하는 것은 불가능할 수 있어도, 이미지의 뒷면과 두께가 있다는 것을 ‘확인’하거나 이를 ‘만들어낼’ 수는 있다.

덕분에 우리는 액정화면에 띄워진 이미지들이 일정한 두께를 갖는다는 것 자체는 확인할 수 있다. 가령 포토샵에서 여러 장의 이미지를 불러온 후 그것을 하나의 캔버스 위에 겹칠 때, 즉 다층 레이어 이미지를 만들면 필연적으로 어떤 것은 맨 위로, 어떤 것은 맨 아래에 놓이게 된다. 두 장의 이미지가 같은 좌표 위에 놓일 순 있어도, 같은 높이로는 놓이지 못한다. 즉 각각의 레이어가 각자의 높이(두께) 좌표를 갖고 있다는 것이다. 이런 지점에서 두 이미지가 같은 높이에서 겹쳐지지 못하고 필연적으로 한 장은 아래로, 한 장은 위로 올라간다는 것은 그것이 어떤 두께를 가진다는 걸 증명한다. 물론 한 캔버스에 수백 또는 수 천장의 이미지를 겹쳐두더라도 그것이 z축을 가질 만큼의 높이는 만들어내지 못한다는 점에서 이것이 레이어에 두께가 없음을 증명하는 것이라 볼 수도 있겠지만, 다른 한편으로 그것이 어떤 순서에 의해 쌓인다는 것은 명백하므로, 레이어의 두께가 매우 얇은 것이라고 보면 이 역시 불가능한 가정은 아니다.

2003년 발표된 포토샵 CS 이후 버전들이나 라이노, 캐드, 스케치업 등 3D 모델링 프로그램에서는 x, y축에 완전히 달라붙은 이미지를 일으켜 세워 x, y, z 축이 존재하는 공간에 이미지를 띄워놓을 수 있게 됐다. (물론 여기서의 z축은 액정화면 위로 솟아나는 물리적인 높이를 갖진 않는, 어디까지나 2D의 액정화면을 3차원 공간으로 가정한 가상의 z축이다) 이렇게 디지털 캔버스의 3차원 축 안에 일으켜 세워진 이미지는 좀 더 가시적으로 그 두께를 확인할 수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사용자가 그 두께값을 설정하지 않는 한 이미지가 태생적으로 가지고 있는 두께를 측정하는 것은 여전히 불가능하다. 이렇게 2차원 이미지가 가상의 z축을 부여받는 사례로는 온라인 서점의 ‘책 미리보기’나 E-Book 플랫폼에서 책을 살펴볼 때, 다음 페이지로 넘어가는 이미지 효과를 떠올려 볼 수 있다. 마치 책장을 넘기듯 페이지가 넘어가는 그 순간 우리는 종이인 척 하는 이미지의 두께를 목격할 수 있다. 하지만 이는 마치 원근법처럼 어디까지나 2차원 안에서 상정되는 3D에 불과하다는 점을 고려하면, 이미지의 두께 또는 이면은 그것의 존재 여부의 문제이기보다는 우리에게 그것이 필요하다고 보는 게 맞지 않을까?



3. 두께를 가지지만 정확히 측정할 수는 없고 한없이 얇은 것, 그것이 아마 디지털 이미지의 두께를 설명할 수 있는 표현이 될 수 있을 것이다. 0으로 수렴하지만 결코 0이 되진 않는 값. 이미지의 두께가 있다면 그 이면, 그러니까 지금까지 봐온 정면이 아닌 다른 각도에서 보는 이미지도 떠올릴 수 있다.



4. 액정화면에서 만들어진 이미지 데이터들은 각자의 형식과 용도에 따라 다양한 방식으로 내보내기(export) 될 수 있다. 종이에 프린트된 문서가 될 수도 있고, 인쇄소를 거쳐 책이 될 수도 있다. 혹은 빔프로젝터나 영사기를 거쳐 특정한 색상을 가진 빛으로 변환된다. 또 어떤 경우 3D 프린터를 거쳐 3차원의 사물로 출력되기도 한다. 그렇다면 이들이 여러 형태로 출력된 결과물이 갖는 두께가 곧 이미지의 두께가 될 수 있을까? 꼭 그렇지는 않을 것이다. 종이에 프린트된 이미지는 분명 두께를 갖지만 이는 종이의 두께라고 보는 편이 맞다. 하지만 뭔가가 프린트된 종이와 아무것도 프린트되지 않은 종이의 무게가 완전히 똑같진 않을 것이다. 잉크젯 프린터에서 출력된 종이에는 잉크가 스며들고, 레이저 프린터에서 토너 가루가 얹어진다. 암실에서 뽑아내는 사진 역시 화학작용에 의해 무언가 결합하거나, 떨어져 나간다. 다만 빔프로젝터를 통해 출력된 이미지의 경우, 빛은 질량이 0이므로 빛으로 이뤄진 이미지에 두께가 있다고 과학적으로 주장하기는 어렵다. 하지만 이 글이 과학적 사실을 따져 보려는 것은 아니므로 이 역시 액정화면과 같이 0에 수렴하지만 0은 아닌 것으로 상정해 보려 한다.

이처럼 오프라인의 세계로 한 발 나온 이미지들 역시 미세한 두께를 가진다고 볼 수 있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이미지가 얹어지거나 달라붙는 어떤 지지체의 존재를 필요로 한다. 종이 없이 잉크만으로 어떤 이미지가 만들어질 수 없고, 필름엔 셀룰로이드 지지체가, 빔 프로젝터엔 빛이 모여들 스크린이 필요하다. 또한 지금까지 등장한 이미지 중 3차원을 가장 유사하게 구현하고 있는 VR(Virtual Reality)의 경우에도, VR용 이미지를 인간의 시야에 맞춰 볼 수 있게 하는 지지체로서의 HMD(Head Mounted Display)가 없다면 그저 찌그러진 평면 이미지에 불과하다. 결국 이미지는 지지체와 결합해야 우리가 인식할 수 있는 형태로 만들어진다.



5. 위의 논의에서 한 가지 엇나가는 사례가 있다. 3D 프린터를 통해 2차원에서 3차원 입체로 변환된 이미지. 3차원을 가장한 가상의 z축이 오프라인에서도 높이를 갖는 z축으로 전환된 사례. 물론 이러한 3차원의 이미지 역시 지지체를 갖는다. 돌, 나무 ,석고 등 조각에서 흔히 사용되는 재료들을 비롯 3D 프린터를 통해 나온 입체는 플라스틱을 지지체로 가질 것이고, 레디메이드처럼 기존에 존재하는 물건을 가져왔다면 그 물건 자체가 지지체가 될 것이다. 그리고 이는 앞서 살펴본 평면 이미지의 사례와 달리 이미지와 지지체가 결합하는 방식이 아니라, 지지체가 곧 이미지가 된다. 이런 측면에서 입체를 ‘지지체 자체를 가공/변형하고 이를 조합/선택한 것’으로 설명할 수 있을 것이다. 3D 프린터의 사례에서 흥미로운 점은 이것이 2차원의 이미지 상태에서는 두께와 이면을 가질 수 있었지만, 3차원 오브제로 출력되는 순간 두께도 이면도 갖지 않는다는 것이다. 두께와 이면의 기준이 되는 ‘정면’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우리는 입체를 눈앞에 두고서도 마치 2차원 이미지를 보는 것처럼 ‘정면’을 상정하고, 이를 기준으로 이면과 두께를 규정해 왔다.


6. 같은 캔버스라 할지라도 그것을 벽에 부착해 캔버스의 물성을 ‘보이지 않는 것’으로 상정하고 그것의 ‘이미지’만을 보여주는 것과, 캔버스를 하나의 오브제로 보고 이를 4면에서 볼 수 있게 전시장 가운데에 설치하는 것은 분명 다른 맥락으로 독해될 것이다. 우리가 입체 작품들을 파악해 온 방식을 떠올려 보자. 전시장에 가서 작품 주변을 둘러보며 살펴보는 경우를 제외하고(종종 전시장에서도 입체 작품의 4면을 모두 살펴볼 수 없는 경우가 있다), 우리가 입체 작품을 보는 경로는 대부분 그것을 촬영한 사진 이미지를 통해 이뤄진다. 그리고 이러한 ‘작품 도판’ 이미지들은 암묵적으로 입체 작품의 정면에서 촬영된다. 그런데 입체 작품의 정면은 도대체 어디를 말하는 것일까? 우리가 일반적으로 ‘정면’이라 생각하는 입체 작품의 이미지는 어떻게 만들어(또는 정해)지는가?



7. 사진은 그 탄생부터 지금까지 꾸준히 그리고 다양한 방식으로 증명의 도구가 됐다. 이는 단순히 범죄현장의 증거 사진뿐 아니라 CCTV나 블랙박스와 같은 이미지를 비롯해 SNS의 수많은 인증샷과 모니터/스마트폰의 화면 캡처 이미지로도 확장됐다. 마치 세상의 모든 것들을 2D 이미지로 변환시킬 기세로 찍고, 저장하고, 공유한다. 덕분에 어느 순간부터 우리는 사진으로 찍을 수 없는 것을 존재하지 않는 것으로 생각하게 됐다. 앞서 살펴본 E-Book의 사례처럼, 액정화면의 평면 이미지는 뒷면이 존재하지 않는데도, 마치 그것이 존재하는 것처럼 구현된다. 이와 대조적으로 입체 작품의 뒷면이나 밑면-윗면 그러니까 도판 사진에서 보이지 않는 부분들은 마치 달의 뒷면처럼 분명 존재하지만 마치 존재하지 않거나 우리가 볼 수 없는 것으로 여겨진다. 이는 평면회화를 복사 촬영한 도판 사진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인데, 도판은 회화의 이미지만을 보여주면서 우리에게 회화가 물리적인 안료와 캔버스가 결합한 형태라는 사실을 잊게 만든다. 입체 작품의 도판 사진은 정면으로 상정된 특정 시점/방향에서의 작품의 모습만을 보여준다. 사진에서 보이는 부분보다 가려지거나 배제되는 부분이 훨씬 많다. 특히 작품이 (최하늘의 경우처럼) 입체의 내부와 단면을 보여주려는 경우라면 도판에서 탈락하는 부분은 훨씬 많아진다. 이런 측면에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입체 작품들을 사진으로 기록해야 할 이유는 무엇일까? 혹은 사진 이외의 대안은 존재할 수 있을까? 명백하게 두께와 이면을 갖거나 재현하는 이미지가 등장한다면 그것은 이런 사진을 대신할 수 있을까?

 


2017. 11. 10. 16:13  ·  critique    · · ·